저번 오페라에 대해서~ 조금 부족한 부분을 더 채워보도록 하겠습니다.
음악 학부 여러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레포터에 힘이 되길 기원 합니다.^^>
크~~ 이젠 역사 나왔 습니다.
오페라의 역사
서양음악의 역사중, 오페라만큼 그의 시작이 분명한 음악양식은 없다. 오페라의 발생장소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Bardi 궁전이며, 때는 1597년 르네상스말경이다.
백작의 저택에 모인 음악가들과 시인들은 고대 그리스의 음악극을 재현시키려는 의도에서 시인 O. Rinuccin(1563∼1621)가 고대 그리스의 신화를 바탕으로 각색한 대본에 J. Peri(1561∼1633)와 G. Caccini(1550∼1618)의 협력으로 '다프네'라는 음악극을 만들어냈다.
이렇듯 오페라는 고대 그리스 문화의 재건이라는 르네상스의 이념을 통해 시도되었던 것이다. 초기 오페라의 대본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따온 것이 대부분이며, 음악 또한 극의 내용을 보다 잘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초기의 오페라는 가사의 운율을 살린 레시타티브식의 선율인 stile recitative가 극 전체를 이끌어 갔다.
또한 초기의 오페라는 단지 독창 선율에 악기의 반주가 수반되는 정도이며, '다프네'악보는 일부분만이 전해지므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오페라는 Rinoccini 대본에 Peri가 작곡한 '에우리디체'(1600)라 할 수 있다. 1602년에는 Caccini가 Rinuccini의 대본으로 '에우리디체'를 작곡했다.
이러한 탄생기에 있었던 오페라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1. 독창이 중심적이며 이는 당시의 monody가 점차 세력을 얻게 된 풍조와 같은 시기이다.
2. 르네상스 시기의 현대적인 경향을 대표한 사람들에 대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내 용이 다분히 현세적이고 세속적이었다.
3. 이탈리아에서 발생하였다.
4. 특정 지식인들의 그룹에서 인위적으로 탄생한 것으로 이론적으로 여러 가지 모순점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러한 초기의 오페라는 베네치아로 옮겨지면서 번성하게 되었다. 초기 이탈리아 오페라의 대가인
Monteverdi는 '오르페오'를 1607년에 초연하였다. 이 오페라는 최초로 대규모 관현악단을 사용한 작품으로 유명하여, 관객동원에서도 획기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베네치아 오페라는 17세기 말에 이르러 그 전용극장이 17개나 생길 정도로 대중의 이기를 얻었는데 이러한 대중화는 오페라의 음악양식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극적인 구성보다는 외형적인 면을 중시하여 부대 장치와 의상이 극도로 화려해지는가 하면 대규모의 악단이 반주를 하게 되고 무미건조한 레시타티보대신 서정적이고 화려한 아리아와 이를 부르는 대수가 대중적인 인기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아리아 중심의 대중적인 오페라는 나폴리에서도 크게 번창했다. 오페라가 인기를 더해가는 만큼 상연시간 또한 길어져 오페라의 막과 막사이에는 경쾌하고 코믹한 내용의 막간 음악극이 삽입되었는데 이것이 점차 인기를 얻게 되자 따로 상연되었고, 이를 원래 오페라인 오페라 세리아와 구별하여 오페라 부파라 불렀다.
이탈리아식의 오페라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 크게 성행한 것이 사실이지만 이와 함께 각국은 그들 나름의 고유한 음악극의 전통을 만들어 갔다. 루이 14세 시대의 Lully는 이탈리아식의 오페라에 발레를 첨가하고, 프랑스어의 억양을 살릴 수 있는 레시타티브를 창안하여 프랑스적인 오페라의 전통을 시작했고, 프랑스풍의 서곡 양식도 창안했다.
영국에서는 음악과 연기, 무용을 결합한 가면극의 일종인 마스크가 있었고, 독일에서는 징시필이라는 음악과 연극을 결합한 음악극이 있었지만 이탈리아 오페라의 위세에 압도되었다.
아리아 중심의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프랑스식의 오페라, 독일의 징시필을 결합하려는 시도는 Gluck의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가수 중심, 아리아 중심이었던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벗어나 극의 내용을 보다 중요시하였고, 극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가수의 불필요한 장식을 제거하고 극과 음악을 통일시키려는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오르페우스' 이외에도 '알체스테' '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 등 그의 개혁 정신을 실현한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Mozart는 이탈리아의 오페라 양식은 고수하면서, 독일 징시필의 전통을 이어받은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피가로의 결혼' '돈 지오바니' '여자는 모두 그런 것' 등을 오페라 부파의 전통에 충실한 것이고, '후궁으로의 도주' '마술피리' 등은 징시필에 속하는 것으로 대본 또한 독일어로 되어있다.
Mozart 최후의 오페라 '마술피리'는 이탈리아 오페라와 독일의 징시필을 성공적으로 결합한 대작으로서, 이탈리아풍의 아리아와 독일풍의 민요등 이탈리아적인 화려함과 독일적인 소박함이 한데 어우러져 있어 그의 천재성을 대변해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Beethoven은 평생동안 단 한편의 오페라 '피델리오'를 작곡하였다. 이 작품은 남편은 구하기 위해 남장을 하고 감옥으로 뛰어드는 부인의 헌신적인 사랑을 묘사한 작품으로 몇 차례의 개작을 거치고 난 후에야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오페라 자체보다는 오히려 몇차례의 개작이 있을때마다 새롭게 작곡된 서곡이 더욱 유명하다.
독일 국민 가극의 전통은 Weber의 '마탄의 사수'에 이르러서야 확립된다. 이 작품은 오베르가 쓴 독일의 전설을 소재로 취한 것으로 대사를 말하는 부분과 노래하는 부분으로 나누는 징시필의 전통을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 아니라, 대본 또한 독일의 전설을 따르고 있으므로 Wagner와 R. Strauss로 이어지는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의 시발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반면,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는 Rossini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Donizetti의 '사랑의 묘약', Bellini의 '몽유병의 여인' '노르마' 의 3개 거성이 현대에 이어지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양식을 확립시켰다.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전반부터 그랜드 오페라 양식이 성해하였고 Myerbeer가 활약하였다. 또한, 오페라 부파 계통에서는 오페라 코미크가 생겨났으며 보와엘디외나 오베르가 많은 작품을 남겼다.
Wagner와 함께 오페라 작곡가의 대명사로 불리우는 Verdi는 독일의 오페라와는 다른 이탈리아 오페라의 전통을 완성했다. 그는 당시의 멜로디 중심적이고, 가수 중심적인 오페라에서 탈피하여 풍부한 관현악적인 효과와 극적인 요소의 일치를 추구했다. 세익스피어의 희곡을 오페라화한 '오델로'는 극중 인물의 심리적인 성격 묘사까지도 음악으로 잘 처리되고 있어 베르디의 최대 걸작으로 꼽힌다. 또한, 오늘날 가장 대중적이고 널리 상연되는 오페라의 하나인 '춘희'와 쉴러의 희곡을 오페라화한 '돈 까를로', 그리고 무대 장치와 소품이 극도로 화려한 '아이다'등이 유명하다.
Wagner는 이러한 낭만주의 오페라의 뒤를 이어 종래의 오페라 양식과는 다른 악극을 대성시켰다. 그는 종래와 같은 번호 오페라를 배격하고 무한선율을 사용하며 음의 흐름을 일과시켰으며 음악과 극의 일치를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시도하였다. 그가 창안한 시도동기도 이러한 시도의 일환으로 일정한 인물, 사건, 감정등에 고정적인 선율이나 동기를 두어, 그 동기가 부여한 인물, 사건등을 연상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함께 극도의 반음계적 화성을 사용하여 조성의 붕괴를 초래하였다.
그의 대본은 모두 작곡자 자신이 썼고 유럽의 전설에 나오는 영웅들을 소재로 한 것이 대부분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주곡, '로엔그린'의 축혼 행진곡, '탄호이저'의 순례자의 합창, 저녁별의 노래등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음악이다.
그의 악극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니벨룽겐의 반지'이다. 장장 4일에 걸쳐 공연되는 이 작품은 총 15시간의 공연 시간을 요하는 사상 최대의 작품이다. 서야에 공연되는 '라인의 황금'은 세계의 창조를 의미하며, 첫날에 공연되는 '발퀴레'는 인간의 탄생과 성장을 제2일의 '지크프리트'는 영웅 지크프리트의 등장을, 마지막 날의 '신들의 황혼'에서는 지크프리트의 죽음과 신들의 명령을 묘사하고 있다.
Wagner가 정립한 음악극, 즉 음악과 극의 내용의 통합은 R. Strauss에 이어진다. '장미의 기사'와 '살로메'는 성서에서 세례자 요한을 탐한 살로메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다. 또한, 관현악법의 모든 기교가 동원되어 극을 전개하고 있으며, Wagner에서 비롯된 관현악의 부각은 R. Strauss에 이르러 극치에 다다른다.
19세기에 이르러 프랑스에서는 그랜드 오페라와 오페라 코믹의 구별이 없어진다. Gunod의 '파우스트'와 Saint - Sane의 '삼손과 델릴라', Masnet의 '미뇽'등이 19세기 프랑스의 오페라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또한, 독일출신의 작곡가 Offenbach는 오페레타인 '천국과 지옥', '호프만의 이야기' 등으로 유명하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러시아에서는 국민악파가 탄생된 이래로 민족의 역사나 문학 작품을 소재로 한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Borodin의 '이골 공'은 그의 생전에 완성을 보지 못하고 Rimsky-Korsakov와 그의 제자 Dlazunov가 완성시켰다. Rimsky-Korsakov는 '사드코'와 '금계'를 Mussorgsky는 푸시킨의 사극을 오페라화한 '보리스 고두노프'를 남겼다. 반면, 푸시킨의 작품을 각색한 Tschaikobvsky의 '에프게니 오네긴'은 러시아 이외의 지역에서 가장 많이 상연되는 오페라이다.
20세기에 이르러 오페라의 작곡은 19세기 만큼 활발하지 못하였다. Debussy의 '펠리아스와 멜리장드'는 가장 인상주의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Berg는 12음기법을 사용하여 '보체크'를 작곡하였다. 미국의 Gershin은 재즈기법과 흑인 영가의 선율을 바탕으로한 '포기와 베스'를 작곡하였고, 헝가리의 Bartok는 '푸른 수염의 영주님의 성'에서 2인의 등장인물만이 출연하는 단장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Britten의 '피터 그라임스'는 20세기 영국의 오페라를 대표하고 있고 이탈리아 출신의 미국 작곡가 Munotti는 '아말과 밤의 방문객' '전화' '노처녀와 도둑'등 무대효과가 뛰어나 오페라를 작곡하였다.
19세기 오페라에 대한 반응
◆ 스탕달(M.de Stendhal:1783-1842)
'적과흑'이라는 소설로 유명한 프랑스의 소설가, 어려서부터 음악을 배웠으나 전문 음악인으로 나아가지 않고 음악 청취자, 평론가로 남는다. 롯시니의 칭송자로 화성이 선율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빼앗지 않고, 선율에 보조적인 것으로 남아 있어야 옳다 고 말한다. 그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권위적인 것들은 천재성을 억누른다고 이야기한 다. 스탈당은 선율을 옹호하기 위해 음악교육까지 비판함. 그는 음악은 사회적으로 기여해야하는 책무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 마찌니(Giuseppe Mazzini : 1805-1872)
이태리의 자유투사 마찌니는 롯시니의 '윌리엄 텔'과 마이어베어의 '청교도'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조국 이태리의 통일을 위해 헌신하여 '이태리 통일의 아버지'라불린다. 그는 예술이 더 발전해야 할 것을 주장하면서 예술 착상이 이미 최고의 발전 상태에 도달하여 가장 높은 표현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안 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선율'은 '개인'을 '화성'을 '사회적 사고'를 대표한다. 전자는 이태리 음악, 후자는 독일음악의 특성이다.
그는 음악이 시대, 민족, 법칙들과 결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롯시니가 그런 종합을 완성했다고 주장한다.
◆ 하이네(Heinrich Heine : 1797-1856)
독일의 시인, 그이 시는 민요적인 성격 때문에 많은 작곡가들의 노래가사로 인용했다. 힐러, 브람스, 바그너, 무소르그스키, 차이코프스키등이 그의 시를 가사로 사용했다. 1831년 파리에서 신문 통신원으로 지내면서 음악 비평가로 활동한다. 그는 많은 작곡가들과 교류했다.
그의 음악관은 낭만주의 자들과 일치하는데 음악은 경이로움이며 사고와 현상의 중간에 있으며 정신과 물질 세계의 중계자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음악의 이론적인 부분을 잘알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음악을 이론화 시키는 것 보다 불충분한것은 없다고 비판함.
하이네는 마이어베어의 편에 섰는데 '혁명의 시인'이었던 그는 마이어베이가 주장하는 화성이 사회를 유도하고 이것은 7월혁명 시대 와도 연관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선율적인 음악은 구식으로 보고 화성적인 작품을 더 근대적인 것으로 보았다.
◆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
아일랜드 출신의 극작가로 기지가 번득이는 그의 말솜씨는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거리를 제공했다. 음악가를 어머니로둔 그는 어릴 때부터 19세기 오페라에 매우 친숙했으며 문학가가 되기 이전에 신문에서 음악 평론가로 일했다. 그는 모차르트와 바그너를 좋아했으며 바그너의 '니벨룽겐'을 오늘날의 오페라(Drama of Today)로 칭송했다.
그는 박절로 나누어지는 음악이 낮은 수준의 음악이라고 보았고 비박절적인 면을 가진 바그너의 곡을 '니벨룽겐'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음악이 '예술중에서 가장 매혹적이며 감탄할 만한 존재'가 되어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음이 부속품으로 존재하여 왔으나 이제는 장식적 음악 구조로부터 확실히 독립하여 스스로 존재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매력적이라고 이야기 한다.
쇼는 바그너를 '탁월한 문학적 작곡가'로 보았다. 바그너는 오페라 대본을 직접 썼으며 그로인해 오페라의 극적인 통일성과 교향적 명확성을 부여하고 베토벤도 제9교향곡으로 전달하지 못한 사상을 바그너는 자신의 음악극을 통해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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